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사벨 1세 (문단 편집) == 생애 ==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공주로 태어났다. 정국이 불안한 상황에서 이복 오빠인 [[엔리케 4세]]가 왕으로 즉위하게 되었으며, 즉위 후 엔리케 4세가 새어머니인 이사벨과 이복 동생들을 궁에서 쫓아내 가두게 된다. 이로 인해 이사벨 일가는 군대에 의해 철저히 감시되고 생필품도 제때 받지 못하는 등, 가혹한 감금 생활을 했다. 포르투갈 왕족 출신인 어머니 이사벨 태후[* 이 집안은 모계로 이사벨이라는 이름을 7대에 걸쳐 [[대물림]]했다고 한다.]는 일국의 공주 출신 왕비에서 갑자기 수감이나 다름없는 삶을 살게 된 데다가 의붓아들 엔리케 왕에 대한 증오와 두려움 때문에 결국 정신 이상을 일으켰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어린 이사벨은 공주라는 신분에도 불구하고 정신 이상이 일어난 어머니와 더 어린 동생을 돌보며 직접 빨래도 하고 밥도 짓는 강인한 생명력을 보였다. 우울함과 절망을 꿋꿋이 이겨낼 수 있었던 원동력은 가톨릭 신앙이었다고 한다. 정국이 다소 안정된 후 왕은 이사벨을 가까이에 두고 감시하려는 의도로 다시 왕궁으로 불러들인다. 태후가 사망하고 엔리케 왕에게도 오랫동안 후계자가 태어나지 않은 상황으로 흘러가면서 잠재적인 왕위 계승자, 내지는 왕녀로서 정략 결혼에 쓰일 수 있는 카드가 되었다. 이사벨은 처세에 능해서 이러한 엔리케 4세의 여러 가지 의심에서 벗어나 사춘기가 넘은 나이에 기어이 교육의 기회도 얻고, 훗날 긴 내전을 거푸 치르면서 마침내 왕의 자리에 오르는 데 성공한다. 물론 이웃 [[아라곤 왕국]]의 페르난도 왕자와의 결혼 과정에서 큰 마찰도 있었으나 엔리케 4세에게 결국 살해당하거나 하지는 않고 엔리케 왕의 딸인 후아나 공주 등 경쟁 세력들을 모두 제치고 최종승리자가 되었다. 또한 이사벨은 남편 페르난도와 함께 남쪽에 남아있는 마지막 이슬람 왕국 그라나다를 정복하여 [[레콘키스타]]를 완성하였다. 여담으로 남편 페르난도는 전장에서 보내는 기간이 많았으므로 부부가 함께 있는 시간이 많지 않았고, 카스티야와 아라곤은 그때까지는 연합왕국일 뿐 통합된 국가는 아니었으므로 두 사람은 부부이면서도 서로 미묘하게 견제하는 사이였다. 한편 이사벨은 모든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보물들까지 팔며 [[콜럼버스]]를 후원하기도 하였고 마침내 신대륙 [[아메리카]]를 발견하였다. 왜 이사벨 여왕이 이토록 콜럼버스를 후원하였는가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야사가 있다. 콜럼버스가 자신이 믿은 항로에 대해 증명해 보인 갖가지 방법이라든가, 이사벨 여왕의 꿈에 계시가 있었다든가.[* 가장 허무맹랑한 이야기는 남편 페르난도와 떨어져 있는 기간이 길어서 남자답고 언변이 뛰어난 콜럼버스에게 매력을 느꼈다는 설일 것이다. 하지만 가톨릭 여왕을 자처하던 이사벨 여왕에게 이런 스캔들은 당연히 없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 당시 유럽의 왕실 혼인 정치에 현대적 연애관을 투영시키는 건 무리라지만, 요즘의 관점에서도 이사벨과 페르난도는 남편이 전쟁 때문에 같이 보내는 시간이 적었지만 서로 애정이 깊고 신뢰가 강한 편이었으며 자녀들도 여러 명을 낳았다. 더구나 당시 잘 봐줘야 무모한 모험가 내지 어쩌면 사기꾼에 가까웠을 변변찮은 사내인 콜럼버스와 일국의 공주 출신 여왕이라는 고귀한 신분, 가톨릭을 의지해 살아오고 스페인 반도를 종교적 일체로 통일하겠다는 꿋꿋한 신념을 가졌던 이사벨의 스캔들은 본인이 직접 들으면 당장 종교재판으로 불러 '''[[너 고소|너 화형]]'''했을 법한 엉터리 야사이다.] 가장 현실적인 관점에서 콜럼버스를 후원해 준 이유로 추정되는 건 역시 '''[[돈]]'''이다. 당시 이탈리아의 도시 국가들은 지중해 무역으로 돈이 들어오고 옆 나라 포르투갈은 아프리카 무역으로 돈이 들어오고 있었는데 문제는 카스티야는 이런 대열에 아직 합류를 못하고 있었다. 결국 해외 무역항로를 얻으려면 지중해 항로도 아프리카 항로도 아닌 제3의 길이 필요했는데 때마침 그걸 마련했다고 나타난 것이 바로 콜럼버스였던 것. 그리고 실제로도 이사벨이 이렇게나 돈 퍼주며 후원했던 덕에 이 개척 사업의 이익은 몽땅 카스티야에게로 들어왔다. 남편의 나라인 아라곤은 한 푼의 이익도 얻지 못했고 이어 대항해시대가 열리면서 안 그래도 쩌리였는데 더 쩌리가 된건 덤(...) 결국 원래 영토도 더 넓었던 카스티야에 사실상 통합되는 모양새가 된다. 아무튼 당시에는 말도 안 되는 도박으로 보였던 이사벨 여왕의 무모한 투자가 결과적으로 스페인을 유럽 최강자로 만든 대박을 터뜨린 셈이 되었다. 페르난도와의 결혼에도 여러 에피소드가 있다. 이복오빠인 왕 엔리케 4세가 자신을 20살 가까이 많은 포르투갈 왕 [[아폰수 5세]]과 결혼시키려고 들자, 엔리케의 비굴한 외교 등 각종 실정과 재상 [[https://en.wikipedia.org/wiki/Beltr%C3%A1n_de_la_Cueva%2C_1st_Duke_of_Alburquerque|벨트란 데 라 쿠에바]]의 권력 독점에 반발하던 귀족들의 지지를 받은 이사벨 공주가 물 밑으로 다른 남편 후보들을 물색, 최종 낙점한 이웃나라 아라곤의 왕자 페르난도와 서신으로 결혼을 약속하고서 각자의 궁에서 야반도주했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격분한 엔리케 왕의 군대에 쫓기기도 하고 이사벨 공주의 편이었던 추기경이 교황의 결혼 허가증을 위조해 주는 등 갖은 모험을 겪으며 결국 결혼에 골인했다고. 이사벨 1세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기에 스페인에 남은 아랍인들에게 개종이 아니면 죽음을 택하라고 하여 많은 아랍인들이 강제로 개종하거나 죽음을 당했다. 그리고 추방령까지 내려 쫓아내기도 하였는데 추방된 이들은 북아프리카 아랍인들에게 무시 당하거나 죽임을 당하기도 하였다. 이들 일부는 [[오스만 제국]]으로 무사히 도망쳤고 그라나다의 고급 정보를 오스만 측에 전해주었고 이러한 아랍인 탄압은 현재까지도 여왕의 대표적 오점으로 남아있다.[* 그래도 여왕을 위한 변명을 하자면 가톨릭 왕이라는 칭호를 얻은 상황에서 이교인 이슬람을 믿는 아랍인들을 옹호했다간 국가 정체성이 흔들릴 수 있었다. 거기다 그 아랍인들이 스페인 이전 모든 이베리아 기독교 왕국들의 시조인 서고트 왕국 시절부터 수백년을 넘게 치고박고 싸운 원수지간이었기에 더더욱 사정을 봐주기 힘들었을 것이다.] 한편 신대륙에서 온 원주민들에 대해서는 웃음이 많고 순수하다며 그들을 가족과 같이 잘 대해주라고 명하였다. 하지만 그녀 사후 아메리카에서의 살육과 고문을 보면 이사벨 1세의 명령은 잘 지켜지지 않았다. 다만 이러한 행위의 주체들은 주로 [[콩키스타도르]]들이었고 스페인 본국 정부의 공식 입장은 1512년 원주민은 노예가 아니라 유럽인과 동등한 인간이며, 지배하되 동시에 가톨릭 신앙을 전하고 보호해줘야 한다고 명시한 부르고스 칙령에서부터 아예 엔꼬미엔다 제도를 갈아 엎고, 스페인 정착민들과 분리해 부분적으로 자치를 누리는 '이중 공화국 repúblicas de los españoles y de los indios' 원칙을 성문화한 1542년 신 법령까지 상당히 일관적으로 원주민을 일정한 법적 권리와 민권을 지닌 스페인 신민으로 대우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흔히 세간에서 오해하는 것이, 16세기의 콩키스타도르 정복 사업은 스페인 정부가 직접 통제하는 중앙의 '군대'를 파견한 적은 한 번도 없고 100% 개인 사업자들이 사병 집단 꾸려서 쳐들어 간 다음 "이 땅과 주민들을 하느님과 우리 왕께 바친다 (그러니깐 땅과 돈과 명성과 연줄을 주세요)"고 '''헌상'''하는 과정이었다.[* 그나마 피사로의 경우에는 카를로스 1세로부터 페루 총사령관, 군사 600명을 얻기는 했지만 '''그게 전부다.''' 명목상의 지위와 수백 명의 병사 외에는 피사로가 마련해야 했다.] 그러니 이미 사업 차원에서 투자로 후원금을 받고 들어 온 인생막장 정복자들의 입장에선 돈 되는 건 뭐든지 해야 해서 고의적으로 분란을 일으킨 것이 크다. 그나마 정치적 감각이 꽤 있고 학식도 비교적 있는 편에 속했던 [[코르테스]]가 쳐들어가 정복한 [[멕시코]] 일대가 예외지,[* 이쪽도 파괴 행위를 안 저지른 건 아니다. 코르테스마저도 정식으로 명령을 받고 갔던 게 아니라 한 탕 해보려고 멋대로 이탈해서 간 것이기 때문이다.] [[페루]]에서 [[과테말라]]까지 스페인의 정복지 대부분은 이름만 빌렸지, 실제로 해 준 것도 없는 스페인에 맞서 콩키스타도르들이 다 해쳐먹겠다고 들고 일어나 '''오히려 그 콩키스타도르를 상대로 다시 정복해야 하는''' 상황이 더 많았다. 물론 이러한 말 안 듣는 콩키스타도르들을 토벌할 군대도 스페인 본토에서 보낸 [[테르시오]] 정규군이 아니라 누에바에스파냐, 페루 현지 부왕령 식민 정부의 총독들이 알아서 어찌 모은, 콩키스타도르들보다 질적, 양적으로 하등 나을 게 없는 경우가 많았으니 국가 차원에서는 몇 차례나 원주민 학대를 금지하는 법안을 발의했지만 실제로는 잘 지켜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도 스페인 지배 하에서는 원주민들의 권리가 이후에 비해선 '그나마' 지켜졌던 편이다. 콩키스타도르나 그 이후의 크리오요들은 어찌되었든 간에 상전은 스페인이라서 속내가 어쨌든 따르는 척이라도 해야 했는데 독립 후에는 눈치 볼 것도 없어져서 스페인 지배 시기보다 훨씬 더 가혹하게 탄압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